영화 오디세이에 대해 대체로 호평이다. 특히 개연성에 있어서는, 원작을 많이 바꿨는데도 오히려 나아진 부분이 많았다. 전쟁의 원인이 사실은 헬레나가 아닌 무역로 확보였다던가, 목마의 바퀴를 빼버려서 오히려 의심할 필요 없이 성 안에 들여놨던가 하는 부분이다. 나는 특히 총대장이었던 아가멤논의 모습에서 이런 개연성을 크게 느꼈다.
아가멤논을 다루는 숏츠들이 많다. 2004년의 ‘트로이’와 이번에 개봉한 오딧세이. 같은 인물, 같은 시기인 만큼 두 작품을 비교하는 사람들이 많았고, 특히 아가멤논의 리더십을 다루는 방식에 있어서 두 영화는 완전히 달랐다.
‘트로이’의 주인공은 아킬레스였다. 아가멤논은 그저 조연일 뿐이었다. 아킬레스의 유능함을 돋보이게 하기 위한 장치로 소비됐다. 권력을 쥐고 아킬레스를 부당하게 탄압하고 이용하는 인물. 딱 거기까지. 아가멤논이 어떻게 그 권력을 형성했는지는 그냥 ‘원래 주어진 것’으로 퉁치고 넘어간다. 나쁜 왕이 아킬레스를 괴롭히는데 무능하기까지? 딱 이 수준.
트로이를 보면서 계속 했던 생각은 이거였다.
영화속 아가멤논처럼 하면 병사들이 왕을 따를까? 신의 아들인 것도 아니고 유능한 것도 아니라 전쟁을 승리로 이끌기는 커녕, 아킬레스를 화나게 해서 전황을 불리하게 만들기도 했다. 하다못해 본인이 앞장서기라도 해야할텐데 그렇지도 않다. 아킬레스가 아가멤논의 지시로 전투에 나서며 ‘대장이 직접 나서야 권위가 선다’고 지적하기도 한다. 영화 속 아가멤논에게서는 권위가 느껴지지 않았다. 저런 인물이 어떻게 저 정도의 권력을 형성했는지에 대한 설명이 빠져있다. 그러니 1차원적인 악역 캐릭터가 됐다.
하지만 ‘오디세이’의 아가멤논은 달랐다. 가장 눈에 띤 장면은 딸을 제물로 바치는 대목이었다. 원작에서는 군대가 이미 출정한 뒤 아르테미스의 분노를 달래기 위해 딸을 바친 것으로 나온다. 그런데 영화는 순서를 바꿨다. 아가멤논은 군대를 모으기 ‘전에’ 딸을 제물로 바친다. 그리고 오디세우스는 그런 아가멤논에게 거역할 수는 없다고 말한다.
이 장면에서 2024-25 의정사태가 떠올랐다. 동참했던 전공의와 의대생들은 커리어를 1년 넘게 희생해야 했다. 그렇게 희생한 이들은 격분해 있었고, 정작 아무것도 희생하지 않은 선배들의 조언은 들으려 하지 않았다. 전공의들과 개인적으로 나누는 대화에서는 그러지 않았지만, 군중으로 그들을 마주할 때는 당사자성이 굉장히 중요하게 다뤄졌었다. 박단 위원장도 사직한 전공의 당사자였고, 가장 영향력 있던 홍재우 선생님도 치열한 경쟁을 뚫어야했던 인기과 전공의였다. 당시 회장 탄핵 이후 치러진 재선거에서는 아들이 전공의였던(당사자성이 어느정도 있었던) 김택우 후보가 회장으로 당선되기도 했다 당선 이후의 결과가 어땠는지는 별개로 치더라도.
당시 나도 하고 싶은 말이 많았다. 지금 와서 봐도 적중률도 높았다. 하지만 아내가 만류하는 바람에 쓰려던 글의 절반도 채 못 썼다. (그나마 썼던게 ‘윤 탄핵을 요구하는 시위로 국민적 공감대를 형성해야’ 한단 기고문이었는데, ‘시위를 해야한다’로만 사용되어서 굉장히 슬펐던 기억도 있다) 아내는 말했다. “희생한 전공의와 의대생들은, 희생하지 않은 전문의 선배의 충고는 듣지 않을 거야.” 정확했다. 그때 분위기는 희생하지 않은 선배는 다들 입 다물라는 식이었고, 희생자들이 만들어낸 군중심리는 아무도 제어할 수 없었다. 개인적으로 적지 않은 돈을 쓰기는 했지만, 나를 포함해도 그들만큼 희생한 선배는 없었으니까.
전쟁은 피를 보고 죽음을 맞이하는 것이다. 의정사태 당사자들의 희생도 정말 컸지만, 전쟁터의 군인들은 이보다 훨씬 더했을 것이다. 목숨을 잃을 수도 있는 것이니까. 군인들은 돌격을 지시하는 왕의 명령을 따르지 않을 수도 있다. 심지어 무의미한 전쟁에 반대하는 반란이 일어날 수도 있다.
하지만 딸의 목숨을 대가로 치렀다면 얘기가 달라진다. “아가멤논도 딸을 희생시킨 중요한 전쟁이니까”는 논리다. 실제로 통했을 것이다. 논란은 그 지점을 본 것 같다. 병사들을 전쟁터로 끌고 간 아가멤논의 리더십은, 다름 아닌 딸의 목숨 위에 세워진 것이라고.
관람평을 보면 이 부분을 이해하지 못한 사람이 많아보였다. 보통은 이렇게 생각하시더라. ‘아가멤논은 딸도 제물로 바친 미친놈이라 참전 안 하면 무슨 일이 생길지 모른다’. 맞는 말이지만 다른 부분이 사실은 더 크다.
오디세우스 입장에서, ‘왕이 딸까지 제물로 바쳤다면 내가 참전을 피할 명분은 없다’는 것. 죽을 수도 있는 전쟁이지만 왕이 딸을 제물로 바칠 정도로 이 전쟁이 엄청나게 중요해졌다는 것. 이정도 밑작업을 해뒀기에 장군과 병사들이 목숨을 걸고 전쟁에 참여하게 되는 것이다. (밑작업 없이 진행했다가 군인들이 태업한 사건은 우리나라에서도 …)
그 뒤로도 아가멤논은 시종일관 카리스마 넘치는 왕으로 그려지고, 오디세우스가 그 앞에서 무릎을 꿇는 장면도 지극히 자연스럽고 설득력있게 다가온다.
참고로 놀란은 촬영 중 배우들에게 꽤 위험한 요구를 한 것으로도 알려져 있는데, 특히 목마 안 촬영은 배우들이 “전혀 안전하지 않았다”고 증언할 정도이기도 했다. 전쟁과 비슷한 상태에서 촬영진을 이끌어야했던 놀란도 이러한 카리스마를 어떻게 만들어낼지 감독생활 내내 하지 않았을까 싶다.
놀란 감독의 오디세이는 걸작이 맞다. 영상과 음향 뿐만 아니라 (2D, IMAX 둘다 봤는데 2D로 봐도 좋다) 주연 배우들의 심리묘사와 그 사이에 있는 개연성까지 완성도가 엄청났다. 특히 페넬로페가 빈왕좌에 대해 언급한 것(I’ve been sitting on that empty throne for 20 years!)가 굉장히 페미니즘적이라는 얘기를 아내와 나눴는데, 확실히 아내와 얘기하니 생각못한 관점이 나와서 재밌는 아이디어가 많이 떠올랐다. 여유가 되면 조만간 이 부분도 써보려 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