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연히 스포 많고 내용도 무척 김)
만화나 영화에서, 어떤 사람이 고민할때 머리 양쪽에서 천사와 악마가 싸우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천사와 악마는 그 사람의 선과 악이다. 선과 악을 더 디테일하게, 감정별로 나눈 영화도 있다. 인사이드 아웃이 그렇다.
머리 속의 천사와 악마, 그리고 인사이드아웃의 감정 캐릭터들은 자기 자신이다. 사람의 머리 속에만 있다. 이런 캐릭터를 머리 밖으로, 하나의 등장인물로 만들어서 이야기를 끌어내는 방식이 바로 도스토예프스키의 방식이다.
(복거일이 도스토예프스키의 소설을 우화라고 표현한 이유가 이것이다. 실존하는 인물은 아니고 무언가를 상징하는 것들을 인물로 만들었으니까.)
‘죄와 벌’의 주인공에게는 존예 여동생인 두냐가 있다. 홀어머니랑 살면서 주인공인 오빠를 위해 헌신하느라 교육수준은 높지 않지만 기품있고 하녀일 하면서도 귀족적인 이미지다.
(사진은 1970년 소련에서 만든 ‘죄와 벌’에 나오는 두냐)
아무래도 존예다보니 두냐를 사랑하는 남자도 많다.
두냐가 하녀일 할때 집 주인이었던 스비드리가일로프(너무 길어서 이하 ‘스비드리’), 스비드리가 몰락한 뒤 스비드리의 부인이 소개시켜준 본인의 부자친척 루진, 주인공 친구인 법대 휴학생 라주미힌 세 명이다.
세명 다 두냐랑 결혼하고 싶어서 난리를 치는데, 나름 메인서사는 아니면서도 메인서사 바로 옆에 찰싹 붙어서 함께 진행되는게 또 읽기힘든 장편소설의 매력이다.
‘주인공의 범죄와 자수’라는 메인스토리 대신, 바로 옆에서 진행되는 ‘존예 여동생 시집보내기’ 스토리에 집중해보았다.
1. 루진
– 돈만 많은 사업가 스타일
이 소설을 일제시대를 대입하면 여러가지가 맞아떨어지는데, 주인공은 법대 진학할 정도로 엘리트라 다들 ‘나 대학생이요’ 하면 다들 놀라 귀족 취급을 해주면서도, 돈이 없어서 끼니를 거를 정도로다.
주인공 엄마는 굶주리는 주인공에게 보내줄 돈도 없다고 피눈물 흘리고 그 와중에 두냐는 성희롱에 ‘니가 꼬리쳤잖아’까지 시전당하면서 온갖 고생하는데, 고생 후 낙이 오는지 오해를 푼 안주인이 소개시켜준 ‘루진’이라는 부자와 약혼을 맺게된다.
루진은 변호사도 아니고 어쨌든 엘리트는 아닌데 법무일 하면서 돈을 많이 번 부자다. 근데 자신을 증명하는 수단이 돈 뿐이라 결핍이 많다. 학벌 컴플렉스도 있고, 아비투스?에 대한 결핍도 있다. 본인의 품위가 없어서 그걸 외모도 품위도 지성도 모두 갖춘 두냐랑 결혼해서 극복하려고 함.
근데 워낙에 가진게 돈 뿐이라, 흙수저인 두냐와 가족들을 돈으로 좌지우지하려 하다가, 본인의 속마음을 주인공에게 바닥까지 털려서 결국 추하게 퇴장하고 만다.
초반에는 주인공이 흙수저의 열등감에 부자인 예비처남에게 패악질 부리는 것처럼 나온다. 그런데 가면 갈수록 루진의 바닥이 드러나고, 돈 빼고는 내세울게 없다보니 돈에 집착하고 스펙도 재산도 없는 두냐를 내려치는 모습이 … 골드스푼 익명게시판에서서 여자들 욕하는 골스남들의 모습과 똑같았다.
‘돈도 스펙도 딸리는 골스녀들이 감히 나를 차?’라고 씩씩거리는 모습이 150년 전 소설에서 정확히 묘사된다 ㅋㅋ
2. 스비드리가일로프
– 강의가 아닌 실력으로 증명하는 픽업아티스트, 호빠남
‘스비드리’는 악역임에도 불구하고 남자 입장에서는 뭔가 짠한 캐릭터다. 해온 짓거리만 보면 개새끼 중의 개새끼인데, 또 당사자 얘기 들어보면 오해도 많이 받은 사람이다.
초반에는 완전히 변태로 나온다. 본인 집에서 하녀로 일하는 두냐 꼬시려다 망해서 동네에서 개쓰레기로 매장되고, 중반까지는 음침한 변태처럼 보이는데 .. 이게 또 주인공이 스비드리 만나서 얘기해보니까 나름 호감형인 멀쩡한 놈인거다.
오해도 많이 받았던게, 두냐도 좀만 잘하면 거의 꼬실뻔했던걸 삐끗해서 망하고 성희롱범으로 전락해버린거고 .. 부인을 폭행해서 죽였다고 소문 돌았지만 본인 얘기 들어보면 그거는 폭행이 아니라 SM 플레이를 했을 뿐이고 우연히 그날저녁 심장마비(or독살) 같은거로 죽은건데 이게 부인을 때려죽인거로 오해받은거임. SM 플레이도 살면서 몇 번 안 했고, 부인을 때리는 일도 SM할때 빼곤 전혀 없었다고 함.
부인 놔두고 딴 여자들 꼬시며 부인 피눈물 흘리게한거 같지만, 또 얘기 들어보면 결혼하기 전에 부인이랑 전부 합의하고 결혼한거임.
스비드리의 마성의 매력에 빠진 부인이 결혼하자 결혼하자 매달려서, ‘결혼 후에도 다른 여자랑 사랑만 안 하면 관계는 가져도 됨’이라는 계약서 쓰고 결혼한 것임.
그런데 스비드리는 계약을 어기거나 여자를 속인적은 없지만 그와의 사랑 문제로 많은 여자들이 자살했고, 스비드리는 ‘내가 뭘 잘못했는데’ 라는 태도로 당당함. ‘나는 유혹만 했을 뿐이고, 평생 책임지겠다고 약속한것도 아닌데 자살한건 솔직히 내 탓은 아니지 않음?’이 스비드리의 태도임.
하지만 여자를 인간대 인간으로 바라보지 못하고 유혹의 대상으로만 대하는 태도 때문에, 진정으로 사랑하는 가족이 그의 주변에는 없다. 마지막에 흙수저 16살 미성년자와 약혼하는데 (나이차이 너무 난다고 주변에선 극혐하지만 흙수저 집안이다보니 막상 애 엄마는 스비드리를 구세주로 여김) ..
마지막 꿈을 통해서, 어린 약혼녀도 본인에게 영혼의 동반자가 될 수 없다는 사실을 느끼고 자살해버림.
죄와벌의 많은 리뷰에서는 스비드리의 자살이 ‘주인공이 살인을 저질렀다는 유일한 증인인 스비드리가 자살해서, 증인도 없고 주인공이 자수 안 해도 되는 상황에서 주인공이 ‘자발적으로’ 자수했다는 근거가 생긴거다’라고 하던데 ..
스비드리의 자살이 주인공의 진정성있는 자수를 위해 필요했던 장치라는 말도 맞지만 나는 스비드리의 자살이, 여자를 같은 인간으로 대하지 않았던 남자들이 느끼는 공허함을 완벽하게 묘사했다고 생각함.
스비드리를 2025년 한국으로 비교하면, 여자를 같은 인간으로 생각하지 않는 픽업아티스트, 특히 여자들 상대로 공사치는 호빠남으로 비교하는게 맞다고 생각함.
조금 틀린 비유긴 하지만 골드스푼 같은 소개팅 어플에도 비슷한 사람 많은데 .. 어플로 여자들 신나게 만나고 다니면서 관계하고 다니는 애들도 스비드리랑 비슷한 느낌이라고 생각 들었다.
더 디테일하게 묘사하면 여자들 세자리수 만나고 관계하면서 몰카 찍다가 수사 들어오니까 자살해버린 윤모씨가 떠올랐음. 이것도 하려면 할말 많은데 심각한 주제라 여기까지.
3. 라주미힌 – 헌신적인 인싸, 메이저 로스쿨 휴학생
같은 흙수저 법대 휴학생인 주제에, 주인공한테 알바 일거리도 넘겨주고 착하기만 한거 같다가도, 친구 여동생인 두냐 보고 한눈에 반해버림. 근데 약혼남 있으니까 들이대진 못하고, 나쁜 약혼남 쫓아내는거(루진) 돕기만 하고 우물쭈물 하다가 주인공이 두냐랑 엮어주니까 좋아서 어쩔줄 몰라함.
주인공이 라주미힌의 친척인 수사관(예심판사)에게 살인자로 의심받으니까 팩트체크도 안 하고 주인공 무한실드 쳐주는 모습을 보여준다. 이런 사람은 토론 상대로 만나면 힘들지만, 내 친구로 옆에 있으면 정말 든든하고 고마운 그런 사람임.
라주미힌은 백퍼 ,, 도스토예프스키가 지랑 친한 친구 중에 한명 모티브로 두고 만든 캐릭터임. 나사 하나 빠져있는 친구 옆에서 헌신적으로 도와주고, 성격도 유쾌해서 다들 좋아하는 성격이다. 나도 책 읽으면서 딱 떠오르는 친구 하나 있었다. 참고로 그 친구는 올해 결혼 예정임.
4. ‘죄와 벌’과 소개팅 어플
루진과 스비드리는 어플에서 흔히 보이는 남자들을 (여자 잘 꼬시는 부류, 못 꼬시는 부류) 양극단으로 나눈 캐릭터 같았다.
돈 많고 스펙 좋고 만나보기 전까지는 엄청 대단해보이지만 막상 만나보면 매력이 확연히 떨어지는 캐릭터, 그러다보니 어떻게든 여자를 가스라이팅 하려하지만 그것도 실패하고 어플 게시판에서 여자들 욕하는 부류가 루진.
여자들 잘 만나고 잘 꼬시고 다니는데 뭔가 공허하게 살아가는 캐릭터가 스비드리. 법적으로 문제될 일은 안 하는데 본인 유혹 때문에 파멸하는 여자들 보고 ‘지들이 선택한 문제임. 내 잘못 아님’ 이라며 죄책감도 못 느끼는거 보면 게시판에은 있는지도 모르고(불평할 일이 없다는 뜻) 열심히 여자들 만나고 다니는 부류가 떠올랐음.
실제와 차이점을 보면, 전자(루진)는 책이랑 똑같이 어딜가나 불평불만만 하고 다니는거 같다.
반면 후자(스비드리)는 소설과 다름. 스비드리는 결핍감을 느끼고 자살까지 하는데, 실제 사람들은 그 전에 결혼할 사람 찾기 시작하는거 같음. 소설은 도씨의 뇌피셜일 뿐이라고 비웃는듯 계속 여자 잘 만나고 다니는 경우도 있고. 결혼 안 한 남자 연예인들이 자살도 결혼도 안 하고 잘 사는 부류같음. (AKA. 화난다 나빠요 좋은직업)
두냐 입장에서는 어플로 이남자 저남자 만나보다가 진정한 사랑을 만난거로 볼 수 있겠다 싶기도 함.
잘 노는 남자 만나봤다가 한번 데이고, 돈/스펙 좋은 남자 만나봤다가 애가 돈 밖에 몰라서 또 데이고, 마지막에 조건은 별로여도 인성 좋은 진국 남자 만나서 결혼한 구도니까.
근데 또 보면, 라주미힌이 조건 나쁜 흙수저처럼 나와도 실제로는 스펙이 상당히 좋은 편이다.
라주미힌이 법대 휴학생이라 별거 아닌거처럼 보여도, 현대시대로 대입해서 보면 SKY+서성한 로스쿨 휴학생임. 당시로는 대학생이기만 해도 엘리트로 쳐주고, 배경인 페테르부르크가 우리나라로 치면 서울특별시. 러시아는 영토도 넓으니까 서울특별시 안에서도 더 특별한 느낌. 그래서 그냥 인서울도 아니고 SKY+서성한 로스쿨 수준 아닐지.
도스토예프스키도, 톨스토이도, 주인공은 존잘 존예던데.. 죄와벌에서는 ‘나름 스펙 딸리는’ 라주미힌도 명문대 로스쿨 학생이라 생각하니 ‘ㄹㅇ 흙수저’들은 어디서 공감해야한단 말인가 슬픈 감정이 들었음 ㅠ
결론은 ‘죄와벌’에 나오는 남자들 전부 소개팅어플인 골드스푼 가입할 수 있는 스펙이라는거. (그렇다면 거기 가입한 여자들은(속칭 골스녀) 두냐냐? 그건 아닌거 같지만 …)
5. 남녀 관점의 차이
아내와 가장 의견이 갈렸던건 스비드리에 대한 관점 차이였다.
아내는 스비드리를 그냥 쓰레기로 보고 깊게 생각하기도 싫어했다. 반면에 나는 스비드리가 나름 양면적인 캐릭터고, 공감가는 부분이 있어서 짠하다고 했다. 아내는 걔가 왜 짠하냐고 짜증냄.
스비드리가 짠했던 이유는, 실제 세상에서 저런 캐릭터는 자살을 잘 안 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도스토예프스키는 스비드리의 ‘공허함’을 극대화하기 위해서 결국 자살까지 시킨다. 자살의 근거를 만들기 위해서 자살 전날밤 꿈을 두 번이나 꾸게 한다.
앞의 꿈은 방에 쥐가 나오는 내용이었고, 두번째는 스비드리가 도와주고 침대에 이불 덮어준 여자아이가 갑자기 음란한 눈빛으로 쳐다길래 스비드리가 놀라는 꿈이었다.
두번째 꿈이 암시하는 내용은, 마치 꿈이 스비드리에게 자살을 강요하는듯 했다. 네가 약혼한 16살 여자아이도 순수한것 처럼 보여도 너에게는 성욕해소의 대상일 뿐 너의 공허함을 채워줄 수는 없을 것이라는 말 아닌가. 마치 너는 살아도 결혼까지 해도 남들처럼 행복하게 살 수 없으니 포기하라는 메시지로 느껴졌다.
꿈을 꾼 다음날 경비원이 보는 앞에서 갑자기 권총자살하는 스비드리가, 기생충에서 갑자기 칼부림하는 송강호처럼 작위적이라는 생각이 들긴 했었다. 그런데 자신의 인생에 회의감을 느끼고 공허함을 강하게 느끼는 사람이 그런 꿈을 꾸면 충분히 자살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런 부분에서 나는 스비드리에 어느정도 공감이 됐고 스비드리의 자살에 몰입했는데, 아내는 남자를 타자로 보다보니 내가 짠해하는거에 공감이 안 됐던듯.
쟤가 저래도 원래 애는 착한애였네 .. 이런 느낌? 자살 안 했으면 이새끼 양아치네 이랬을텐데, 자살까지 하는거 보면 감수성도 여린 애라는거잖아. 여자들이 이상한 페미니스트들 보면서 짠해하는 느낌이 내 감정과 비슷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음.
6. 결.
도스토예프스키 소설은 인간의 머리속에 있는 하나의 감정을 하나의 등장인물로 바꿔버린 ‘우화’라는 주장에 공감이 간다.
그리고 그 우화 속 인물이, 실존인물처럼 느껴지게 하는 능력이 바로 도스토예프스키의 탁월한 부분임.
사람에게는 누구나 찐따같은 면이 있고, 양아치같은 면이 있고, 또라이 같은 면, 헌신적인 면이 있다. 이걸 네 명의 캐릭터로 나눠서 각각의 등장인물이 실존인물처럼 느껴지게 하는건 정말 대단하다고 생각함.
아내는 네명의 캐릭터 중에 나와 가장 가까운 캐릭터는 ‘또라이’를 담당하는 주인공 라스콜니코프라고 말했지만 내가, 그리고 사람들 모두가 넷의 성향을 모두 조금씩 갖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장편이라 읽기 힘들었지만 읽고나서 여러 관점에서 생각해볼 수 있기에 고전으로, 대문호로 인정받을 수 있지 않았나 하는 생각.
죄와벌을 최대한 현대적으로 해석하려 하다보니, 전문의 따고 1년 가량 열심히했던 소개팅 어플 얘기까지 하게 됐다. 요새 미혼 남의들 그 어플 많이 하는거 같던데 공감가는 글이 되었길 바라는 마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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