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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라도 혐오와 자유주의 2

내가 운영하는 의사/의대생 톡방에서 다시한번 공공의대 이슈가 떠올랐다. 문재인 시절 이슈가 되었던 남원 공공의대, 지금은 국립의전원으로 만들어진다던. 천천히, 하지만 점진적으로 진행되는 이슈여서 한번씩 기사가 올라온다.

최근 ‘배재고 야구부 6개월 징계’ 이슈가 있었던 터에 공공의대 이야기가 나오자 멤버 중 한명이 말했다. ‘우덜식 정책’이라는 표현을. 그리고 거기에 혐오표현이라며 반발하는 사람이 나왔다. 처음 말을 꺼낸 사람이 대답했다. 전라도 관련 정책이어서 ‘우덜식’이라는 표현을 쓴 것이고 경상도 정책이었으면 경상도 사투리를 썼을 것이라고. 따라서 혐오발언이 아니었다고.


100명 이상의 의사/의대생들이 카카오톡 톡방에서 4년 넘게 나가지 않았다. 이것은 사실 기적같은 일이다.
의사와 의대생들은 다들 일상이 굉장히 바쁘다. 특히 중요한 정보가 톡방에서 오고가는 경우가 많다. 업무량이 워낙 많다보니 성격이 예민해지고, 카카오톡 업무메신저에 3분동안 피드백이 없었다며(30분이 아니라 3분이다) 화내는 경우도 있다. 물론 3분가지고 화내는 의국은 드물지만, 그만큼 카톡에 예민해지기 때문에, 그런 의사들 카톡방이 4년 넘게 유지된다는 것은 드문 일이다. 개인적으로 톡방을 이렇게 유지되도록 관리할 수 있었다는데 작지 않은 자부심을 느끼고 있다.

카톡방이 유지된 이유는 분명했다. 톡방이 운영되고 그 방에서 의견을 발언하고 청취함으로서 긍정적인 효과를 낳는다는데 확신이 있다면 사람들은 톡방을 나가지 않는다.

나는 카톡방을 작은 사회라고 봤다. 그것도 존 스튜어트 밀의 자유주의에 근거한 사회다. 남들에게 제지되지 않는 자유로운 발언을 허용하고 서로의 의사소통을 원활히 하면서 더 긍정적인 결과물을 낳는 그런 사회다. 이 사회에서는 누군가의 발언을 탄압하지 않고, 환영받지 않는 의견이어도 그것을 최대한 살리고 밝혀서 나중에 세상이 바뀌면 빛나는 아이디어가 될 수 있도록 돕는다.

존 스튜어트 밀의 ‘자유’란 이런 것이었다. 그 때는 틀린 의견처럼 보여도 나중에 보면 맞는 말인 경우가 많다고. 그리고 그 틀려보이는 의견이 탄압당했을때, 다시는 세상에 나오지 못하고 영원히 묻히게 되는 수도 있다고. 코페르니쿠스의 지동설이나, 찰스 다윈의 종의기원도 당시에는 엄청난 비난을 탄압을 받았다. 가까이서는 중국에서 홍위병들이 중국의 문화재들을 반동이라며 때려부수고 없애기도 했다. 존 스튜어트 밀의 자유는 이러한 탄압에 반대했다.

그가 말하던 자유는 어디까지 허용되어야 할 것인가?
단순 욕설이나 혐오발언도 표현의 자유로, 존 스튜어트 밀의 자유로 존중받고 보호받아야 할 것인가?
현대 정치철학자들이 주로 논하는 것이 바로 ‘혐오표현은 어디까지가 혐오표현이며 어디까지 존중받아야 할 것인가?’ 이다.
깊게는 유대인에 대한 혐오가 다루어졌으며, 미국에서는 흑인이나 소수인-LGBTQ로 대변되는-에 대한 혐오, 우리나라에서는 주로 전라도부터 조선족, 외국인 혼혈에 대한 차별과 배제로 까지 이어져 다뤄진다.

소수자 혐오를 기원으로 하여 형성된 전체주의 권력이 힘을 점점 얻어가는 데에는 ‘한나 아렌트’가 탁월하게 밝혀냈는데, 혐오를 통제하는 방식이 또다른 배제와 억압으로 작용되는 부분에 대해서도 우려되는 상황이 발생하고 이런 부분에 대해서는 미러링을 내세운 ‘주디스 버틀러’가 언급되고는 한다.


표현의 자유는 어디까지 존중받아야 할 것인가?
우리나라는 표현의 자유를 넓게 인정하지 않는 편이다.
서구에는 없는 ‘모욕죄’와, ‘사실적시에 의한 명예훼손죄’가 대표적이다.

법에 익숙한 정치인들은 모욕죄와 명예훼손죄에 걸리지 않는 방법을 잘 안다.
그래서 하고 싶은 말을 법에 저촉되지 않게 자유롭게 하는 편이다.

하지만 법에 무지한 일반인의 경우에는 그렇지 않다.
어떤 발언이 ‘모욕죄’에 해당하며 어떤 발언이 ‘명예를 훼손하는 적시’인지 분간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때문에 많은 사람들은, 자신의 의견이 사실관계가 정확하더라도 발언하는데 자가검열을 하게 된다.
자유로운 발언을 하는데 제약이 생긴다는 말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모욕죄와 사실적시명예훼손죄를 폐지하면 어떻게 되는가?
한국 사회는 사람들이 외부 평판에 예민하게 반응한다.
외국에 비해 낮은 강도의 비난과 낙인에도 사람들은 쉽게 위축되는 편이다.
전라도 비난 발언에도, 많은 사람들이 위축되고 낙인과 배제 효과가 발생한다.

‘우덜식’이라는 표현이 과연 혐오발언일까?
전라도 사람들이 호남 이슈에 유독 관용적으로 변하는 모습에 적용되면 표현의 자유로 보장받아야할 것이다.
다만 이것이 전라도 비하로 이어지면서 사회 내의 전라도 사람들의 발언권 위축에 강한 낙인효과를 발생시킨다면 이 또한 혐오발언으로 작용할 것이다.

이러한 발언이 혐오발언인지 여부는 그때그때 상황에 따라 다른것 같다.
하지만 혐오발언인지 아닌지와 별개로, 전라도 사람이 비하받는 감정을 받았다면
이러한 감정은 존중받아야할 것인가? 이는 대체로 맞다고 할 것이다.
여기에 대해서는 ‘정치적 감정’의 저자 ‘마사 누스바움’ 이야기를 하고 싶다.

3편에서는 주디스 버틀러와 마사 누스바움 얘기를 더 해보고자 한다.


이 글은 브런치에 처음 발행한 글입니다. 원문: https://brunch.co.kr/@qkrjiyong/65

All posts on this site are written by Jiyong Iruon Par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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